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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80년을 본다②/ 공주에서 대전으로의 이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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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도청 80년을 본다②/ 공주에서 대전으로의 이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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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2.10.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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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총독 신년회견때 대전이전 폭탄 선언

충남도 우희창 미디어센터장이 각종 기록물과 간접증언을 토대로 정리한 ‘충남도청 이전 역사’를 연재한다. 이 글은 충남도청 홈페이지 ‘충남넷’에도 동시 게재된다. <편집자 주>

▲ 충남도청 정문에서 바라본 중앙로.
2012년 10월 1일. 한가위 연휴였던 이날 충남도청에는 특별한 일 없이 당직자들만 휴일근무에 열중했다. 그러나 80년 전으로 되돌아가면, 바로 이날 도청 앞마당에서는 의미있는 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의 충남도청 이전이 완료돼 열리는 개청식(開廳式) 행사였다. 물론 공주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대대적인 이청식(移廳式) 행사를 따로 열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도청의 대전시대를 알리는 행사였던 것이다. 이젠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전시민의 날’ 행사를 통해 이 날을 기억했건만 이젠 그마저도 잊혀져가고 있다.

충남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은 이미 박중양(朴重陽, 창씨명 朴忠重陽) 제1대 충남도장관 시절 제기돼 충남을 떠들썩하게 한 바 있다. 박중양은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려고 했던 신념적 친일파 중 한 사람이다. 1906년에는 대구 군수로 있으면서 대구읍성의 해체를 주관했고, 1908년 경상북도 관찰사, 1910년 충청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 해 한일병탄이 있었고 관제가 개편될 때 충청남도 장관(도지사)으로 계속 유임되었다.

박중양 건의후 10년 넘도록 진전없어

▲ 제1대 충남도장관인 친일파 박중양.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아들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의 세력가가 도청의 대전이전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니 도청이전은 구체화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도장관이 바뀌면서 10여 년이 넘도록 도청이전에 대한 구체적인 진전이 없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대전은 경부선 철도와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신흥도시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어 예비 도청소재지로써의 입지를 차근차근 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대전에 도시계획위원회가 발족되고 다음해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도청이전 문제가 거론됐다.

야마나시 조선 총독 부임후 본격 거론

이러한 사전 정지작업이 있은 후 야마나시 총독은 1929년 3월 충남도 시찰을 명목으로 대전을 방문했다. 유성 온천장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대전의 일인(日人) 거류민을 대표하는 시라이시 데츠지로(白石鐵二郞)로부터 도청이전에 대한 건의를 받았다. 시라이시는 일본의 귀족원 출신으로 정계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녀와의 스캔들 때문에 도피하듯 일본을 떠나 그의 하녀와 함께 대전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야마나시 총독은 신석린 충남지사, 이케가미 총감, 김갑순(金甲淳, 창씨명 金井甲淳) 중추원 참의, 시라이시 등 5명을 자기 숙소로 불러 도청이전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갑순은 대전에 있던 자신의 개인 토지를 도청 부지로 내놓겠다고 확약했다.

▲ 1930년대 대전 시가지 전경이다. 대전역에서부터 도청까지 중앙로가 일직선으로 나있음을 볼 수 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달해 있다. <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땅투기 귀재 김갑순 도청부지 제공

여기서 잠깐 김갑순에 대해 얘기해 보자. 정운현의 저서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보면 김갑순은 공주사람으로 당대에 발복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은 부자다. 한 때 그는 서울에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조선 제일의 땅부자였다. 공주감영의 관노였던 그는 연줄로 경찰이 되고, 이를 발판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 돈을 벌었다. 봉세관(현재의 세무공무원)과 6개 군의 군수를 지내면서 세금을 횡령하고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투기를 했다고 한다. 특히 초창기 봉세관 시절 역둔토에서 나오는 세금을 착복해 축재했다고 한다.

그의 재산이 껑충 뛴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대전지역 땅 투기였다. 1904년 이후 대전에 철도가 건설되고 관공서가 들어서자 이곳을 눈여겨 보던 김갑순은 호남선 가설계획을 미리 입수해 일찍부터 대전에 집중적으로 땅을 사들였다. 그런 그가 충남도청의 부지를 선뜻 내놓기로 한 것은 도청 이전 후의 개발 이익을 노린 때문이었다.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평당 1~2전 정도를 주고 산 그의 땅이 하루아침에 1만배인 100원 이상으로 뛰었던 것을 보면 그야말로 그는 땅 투기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1930년 그해 8월 야마나시가 뇌물사건으로 물러나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도청이전 문제가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대전에서는 효율적인 도청 유치 활동을 위해 11월 ‘도청이전대전기성회’를 조직했다. 시라이시를 회장으로, 회덕군수와 대전군수를 지낸 김창수(金昌洙) 등을 부회장으로 뽑았다.

이들은 곧 사이토 총독과 이마무라 다케시(今村武志) 내무국장을 만났지만 이전에 대해서는 확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이전계획은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1931년도 새해 예산안이 편성되면서 충남도청 이전비용으로 35만9000원이 책정됐다. 이에 대해 총독부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사이토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 1920년대 대전역의 기관차 모습.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가설되면서 대전은 급격하게 발전했다.<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공주 구제·물가인상 방지 등 선심

드디어 1931년 새해가 밝았다. 1월 13일, 사이토는 총독부 회의실에서 신년기자회견을 가졌다. 새해 시책방향과 총독부의 각종 방침을 설명한 사이토는 이 자리에서 폭탄선언 하듯 충남도청의 이전을 공식 발표했다. 공주에 있는 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하기 위해 예산을 책정했으며 제국의회가 열리면 의안으로 상정시켜 결정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충남도청의 이전 뉴스는 신문지면을 통해 널리 알려졌고 당시 대전에서 발행되던 호남일보(湖南日報)는 이를 머릿기사로 다루었다. 이 발표가 나자 대전은 거리마다 희망과 활기가 넘쳐흘렀다. 김갑순과 시라이시 등이 중심이 되어 시급하게 대전토지주식회사(大田土地株式會社)를 설립해 도청 부지를 확보하는 한편, 뒤따라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해 올 각급 기관의 부지를 마련하고 알선하는 일을 벌여나갈 계획을 세웠다. 그 해 4월 대전은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면(面)에서 읍(邑)으로 승격되는 경사까지 겹쳤다.

<충남도 우희창 미디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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