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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공영회·공주시민회 등 조직해 반대운동

기사승인 2012.10.24  16:5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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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도청 이전(3) 대전이전 발표되자 공주면민들 큰 충격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공주 사람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도청 이전에 대한 총독부의 발표가 있은 직후인 1월 20일 공주군 장기면 신관리 주민들이 유진순(劉鎭淳) 지사에게 보낸 진정서의 내용을 보면 그 당시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진정서에는 “존경하는 지사각하. 다름이 아니라 금번 도청이전 사건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구렁텅이로 떨어져 말이 아닙니다. 지사 각하께서 특별히 사정을 보아주셔서 많은 생명을 구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울며 기원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사실 도청 이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이전부터 도청 이전설이 있었던 만큼 공주의 주민들은 공주공영회(公州共榮會), 공주시민회(公州市民會) 등을 조직하여 도청이전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도청이전이 구체화되는 움직임 속에서 1930년 11월 10일 공주 주민들은 공주시민회를 재조직하고 회장으로 마루야마 도라노스케(丸山虎之助)를, 공주 면협의원인 오경달(吳慶達)을 부회장으로 각각 선출했다. 마루야마는 1906년에 조선으로 건너와 공주에서 전당포 및 담배도매상을 경영했고 마루야마상회(丸山商會)를 운영중이었다.

   
1931년대 공주의 전경. <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진정위원 선출 충남도·총독부·제국의회에 반대 진정

아울러 마루야마와 함께 공주면장 고바야시 소타로(小林增太郞), 도평의원 미야모토 겐키치(宮本善吉) 등을 진정위원으로 선출했다. 진정인들은 충청남도, 총독부, 제국의회에 도청이전 반대의 뜻을 진정했다.

공주의 유림들도 따로 진정서를 1931년 1월 3일 총독부에 제출했다. 권병훈(權丙勳), 유갑수(柳甲秀), 이석(李錫) 등 3명은 진정서를 통해 “도청이 이전하면 유림의 잔명을 보존할 길이 없어진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들은 도지사를 방문하는 한편, 100여명이 도지사 관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31년 1월 13일 총독부가 충남도청 이전 사실을 공표하자 공주는 이전반대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공주대 역사학과 지수걸 교수에 따르면 “공주에서는 총독부와 도쿄에 진정위원을 파견하는 한편, 시민대회를 열고 시장 상인들의 철시, 공주면 주변 면민들의 진정 등의 활동을 펼쳤다”고 말했다.

변평섭의 저서 <실록 충남반세기>에 적힌 이 때의 일화를 보면 그 당시 공주사람들의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읽을 수 있다. 하루는 공주 유일의 극장인 금강관에 불이 났는데, 소방차를 끌고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극장의 소유주가 김갑순이었기 때문이다. 공주 출신으로서 도청이전에 협력하는 그가 미웠기 때문에 그랬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공주-서울간 경비전화선이 끊어지고 전신주가 뽑힌 사건이 일어났다. 공주시민회 회원이었던 김기태(金基泰) 소유의 산에서 생긴 일이었는데, 마찬가지로 공주 사람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이다.

반대운동의 압권은 마루야마 회장 등이 도쿄로 건너가 제국의회 중의원들을 대상으로 도청이전 예산안 삭감을 설득한 일이다. 변평섭은 그의 저서에서 이 때 도쿄로 건너간 일행은 마루야마와 공주의용소방대 김영배(金英培)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아라키라는 웅변을 잘하는 중의원의 도움을 받아 예산안을 삭감을 관철했다고 한다.

반면, 향토사학자 김영한씨는 이러한 주장에 의문을 던진다. 그는 “공식적인 자료를 보면 마루야마 일행이 도쿄로 간 것은 맞지만 마루야마와 도평의원이었던 미야모토를 제외하고는 일행이 더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언제 갔는지도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총독부 공표 전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반대운동 펼쳐

실제 기록에는 김영배씨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어 일본으로 건너간 일행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어쨌든 이들이 도쿄로 떠나자 유진순 도지사는 1월 10일 마루야마 일행에게 돌아오라는 전보를 쳤고 공주군에서도 총독부 방침에 반하는 태도라며 되돌아오기를 촉구하는 전보를 1월 22일과 23일에 발송한 것으로 나타났다. 출발도 1월 10일 이전에 이뤄진 것으로, 총독부가 공식적으로 도청이전을 공표하기 전에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도청이전 반대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김영한씨는 “이 때 당시 도쿄에서 박춘금(朴春琴)이라고 하는 조선인 중의원이 도청이전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은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박춘금은 주먹출신 정치깡패로 청년시절 술집에서 일을 하며 일본말을 배운 것을 밑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출세한 직업적 친일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운현의 저서 <친일파는 살아있다>에 따르면 그는 도쿄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사실상 폭력조직인 상애회(相愛會)를 조직했는데, 일본인 기업주 편에서 조선인 노무자를 학대 착취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제18대 총선에서 도쿄 5구에 출마해 당선된 것은 1932년 2월 20일이었기 때문에 마루야마 일행이 일본에서 반대운동을 했던 1931년의 시점과는 맞지 않는다. 만약 그가 충남도청 이전 반대운동을 도왔다면 상애회 활동을 할 당시였을 것이다. 어쨌든 박춘금은 1945년 조선으로 돌아와 대의당(大義黨)을 조직해 항일 조선민중 30만명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며 해방되자 일본으로 도피한 악질 친일파였다.

어쨌든 마루야마 일행이 일본으로 떠나자 공주에서는 고바야시 공주면장이 시민회장 대리를 맡았는데, 충청남도 내무부장과 공주군수가 주의를 주고 시민회장 대리로 다른 사람을 선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공주시민회는 이를 거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공주시민회 사무실을 수색하고 간부들을 구금하는 등 조치를 취했고 공주시민회는 간부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비롯해 상경 시위, 가두시위 등을 전개했다.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의 모습(현 공주사대부고). 정문 옆에 경찰서가 있다. <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제국의회서 이전예산 전액 삭감…총독부 도평의회 소집

이러한 활동으로 그해 2월 18일 제59차 제국의회(중의원)에서 충남도청 이전안은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 공주와 대전의 입장이 극과 극으로 엇갈린 가운데, 총독부는 예산 복원을 위해 긴급하게 충남도평의회를 소집했다. 도평의회가 자문기관에 불과하긴 했지만 공주시민회는 도쿄에 있던 도평의원 마루야마와 미야모토를 서둘러 돌아오도록 했고 고바야시를 도쿄로 보내 대신 활동하도록 했다.

이때 고바야시는 공주면장으로써 당연히 공주군수의 허가를 얻어야만 했지만, 출장허가 없이 신병치료를 핑계로 일본으로 떠나버렸다. 3월 11일 공주로 돌아온 고바야시 면장은 ▲도청이전 반대운동에 참여한 일 ▲허가 없이 여행한 일 ▲총독부 방침에 반하는 행동을 한 일 등으로 면직처분을 받았다. 현직 공무원이 허가없이 일본까지 건너가 반대운동을 펼쳤던 이 사건은 당시 공주의 반발이 얼마나 셌고 절박했는지를 알려주는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처분은 적당한 후임자가 없고, 공주면의 갱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곧바로 취소되긴 했다.

김영한씨는 “본인은 해임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 때 쓴 시말서를 보면 출장휴가를 냈는데 제대로 접수되지 않았다고 핑계를 댔지만 공무원이 그만한 각오 없이 무단으로 직무를 이탈했겠느냐”고 말한다.

이 때 당시 대전의 경우 일본인들이 주축이 되어 도청 이전운동을 벌였고, 돈이 풍부했기 때문에 회의도 요리집에서 주로 했지만 공주의 경우는 달랐다고 한다. 조선인, 일본인 가리지 않고 돈을 내서 반대운동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도쿄에서의 활동비용은 모두 읍민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충당했는데, 이 때문에 나중에 상인들이 빚을 많이 졌다고 한다.

예산 복원 움직짐에 공주면민 횃불시위·투석전 벌여

도평의회를 소집한 총독부는 귀족원에 제출할 건의문을 채택하도록 했다. 이 건의문에는 도청의 이전은 ▲도세의 진전상 불가피 ▲도민의 복리증진 ▲총독이 선정을 베풀고 있음에도 공주면민은 허구·기만의 반대이유를 들어 제국회의 의원들을 현혹 ▲도청이전이 불발에 그치는 경우 총독정치의 위신 실추 등의 내용을 적고 있다.

중의원에서의 예산안 전액 삭감에 대한 기쁨도 잠시, 이렇듯 귀족원에서 예산이 복원될 조짐을 보이자 공주면민들은 3월 11일부터 횃불시위, 투석전 등 산발적인 시위를 감행해 50여명이 구금되기까지 했다.

   
▲ 공주 주민들이 도청이전 반대 운동을 하다 구금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그러나 한번 기울어진 대세는 어쩔 수 없는 법. 귀족원은 1931년 3월 13일 제국회의의 결의를 무시하고 총독부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로써 오랜 기간에 걸친 도청이전 반대운동은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지수걸 교수가 집필한 <충청남도지>에 따르면 공주 유력자들은 3월 15일 충청남도를 방문한데 이어 3월 18일 총독부를 방문해 “향토애 때문에 그리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라는 사죄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도청이전 대가의 지불’ 등 후속조치를 기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귀족원 총독부안 채택…반대운동 힘 잃어

이후 도청이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그해 7월 발생한 수해로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된다. 전국에 내린 폭우는 유례없이 큰 것으로 충남에서만 37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총독부는 민심이반을 우려해 각 도에 수해복구사업을 독려했다. 긴축 예산 때문에 복구할 자금이 부족하자 불요불급한 사업은 모두 중단하고 복구사업에 투입하라고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이때 충남도청 이전사업비도 불급한 예산으로 분류되었는데, 당시 막 부임한 오카사키 충남지사가 집행단계에 있는 사업의 예산을 전용하는 것에 반대해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이제 공주의 관심은 도청 이전에 따른 보상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있었다. 1932년 7월 10일 공주읍사무소 앞뜰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 총회에서 시민회 대표들은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13가지’와 ‘국비로 시설해 주어야 할 7가지’에 대해 총독부로부터 제대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보고하고 ‘당장 해결해야 할 보상요구 3가지’를 결의했다.

지역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의 모든 요구를 총망라한 것인데, 이중 눈에 띠는 요구사항들은 공주시장(市場)의 읍직영, 공주-조치원 노선의 철도국 직영 등이었다. 이 모두가 김갑순의 소유였는데, 나름 응징을 위한 요구사항이었다. 총독부에 의해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진 요구사항은 ▲금강교 가설 ▲농업학교 개교 ▲사범학교 설립 ▲재판소·잠종시험소 등 각종 부속기관의 대전이전 보류 등이었다.

금강교 가설 등 보상 요구 …대전사람들과 반목하기도

우여곡절을 겪은 도청이전은 그해 10월까지 모두 이뤄졌지만 공주사람들의 응어리진 감정은 한동안 계속됐다. 심지어 대전 사람들은 공주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김영한씨는 “대전과 공주는 극심한 개인적인 반목까지도 했었다”면서 “그 때 당시 공주 사람들은 ‘대전 놈들’이라는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충남의 심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던 古都 공주. 그 전통을 지키려 했던 처절한 투쟁은 이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숱한 어려움을 뚫고 대전으로 이전한 그 도청은 80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곳으로 이전해 새로운 100년을 맞으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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